[김지영] 공주 할머니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공주 할머니


제각기 살아온 모습들에 따라 다르게 채워지는 공간 통해

곱게 늙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 눈, 첫 만남, 첫 선생님…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은 아무것도 없던 곳에 첫걸음을 내디뎌 발자국을 남겨 얻는 성취감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담고 있다.


얼마나 굽이졌는지, 얼마나 먼지 가늠조차 하지 못 하고 시작한 어르신 돌봄이라는 이 긴 여정에서 만난 모든 어르신이 나를 가르치고 깨우치게 한 선생님이지만, 이제는 한참을 돌이켜야 기억할 수 있는 그 시작점에 고운 미소로 설렘보다 진한 여운으로 남은 나의 첫 선생님은 공주 할머니이다.


1995년 추석 하루 전날이었다. 내가 공주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밥 굶는 어르신들을 위해 식사 지원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시어른들의 뜻을 받들어 사회복지법인을 만들고 지원 사업을 시작하여 조금씩 사업을 펼쳐나가던 날이었다.


‘옛날 옛날 먼 옛날에~’ 로 시작하는 동화 속 조그마한 나라의 공주님 같았던 할머니는 150cm가 겨우 될 것 같은 아담한 체구였다. 아흔의 연세에도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늘 따뜻하게 나를 맞아 주셨다. 맑은 할머니의 피부도 별나라 공주 같긴 했지만, 할머니의 실제 성함이 ‘공’ 씨 성에 ‘주’ 라는 외자 함자인지라 더욱 그런 인상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공주 할머니는 기초 생활 수급자였는데, 당시에는 생활보호대상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국가에서 매월 일정 금액을 지원받아 강남의 7평짜리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셨다.


때마침 추석을 맞이하여 집에서 직접 만든 한과를 고등학교 선배님께서 가져다주셨기에 혼자 생활하시는 어르신들께 전달해 드리고자 영구임대 단지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집 앞이지만 한 번도 그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구 임대 단지였다. 명절이 막 시작하는 시점이라 자원봉사자를 찾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단지 내 복지관에서 받은 독거 어르신 명단을 들고 남편과 함께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영구 임대 단지는 장애인과 독거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4차선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일반 아파트와 외견상으로는 그저 비슷한 콘크리트 15층 건물이었다. 저녁이 되어 집집이 불이라도 켜지면 그 차이를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실로 그 차이는 훨씬 크고 충격적이었다. 명단에 있는 30가구에는 공통된 점이 있었는데, 집 크기를 막론하고 입구부터 잔뜩 쟁여져 있는 짐 때문에 사람이 들고나기도 힘들었다. 또한 복도식 아파트인지라 집 앞과 복도에 어김없이 많은 짐이 나와 있었다. 크고 작은 화분에서부터 아이들 자전거, 심지어 옷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이 쌓여있었다. 짐으로 인해 좁아진 입구 탓에 몸을 틀어 안으로 들어가면 숨 막힐 듯 켜켜이 쌓여있는 온갖 물건들이 아우성치며 뿜어내는 이런저런 냄새들이 그나마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공간의 공기를 더욱더 무겁고 탁하게 만들었다. 집이 좁다 보니 필요한 물건은 많은데 수납공간이 모자라 그렇겠거니 알아가면서, 한 집 한 집 추석 인사를 전하러 다녔다.


‘…계세요?’

‘할머니 계신가요? 영산에서 들렀습니다.’

인사 소리를 듣고서야 할머니께서 문을 열어 주셨다. 단지 내 많은 가구가 문을 열어 놓고 생활하는 데 반해 할머니 댁의 문은 닫혀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상자 하나 내어놓은 것이 없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입구에도 아무것이 없었다. 오직 할머니의 손바닥만한 외출용 단화 한 켤레와 똑같이 작은 슬리퍼 한 켤레만이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이었다.


여느 어르신 댁과 같은 구조의 작은 집이었지만, 할머니 댁은 공기부터 달랐다. 침실에는 옷장으로 보이는 한 짝짜리 흰색 장과 침구가 들어갈 것 같은 이불장이 전부였고, 복도에 면해있는 작은 문간방에는 조그마한 5단 서랍장 하나에 앉은뱅이 책상만이 놓여있었다. 다른 분들과 비슷한 시기에 입주하셨을 텐데 할머니 댁은 벽지마저도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 댁은 고즈넉하고 차분했으며 공기마저 가볍고 풍요롭게 느껴졌다.


가벼워진 공기 덕에 한결 수월해진 마음으로 할머니께 선배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한과를 전해드렸다.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맞아주던 친절한 미소가 살짝 수줍음이 담긴 미소로 변했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무던함으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늘의 뜻을 알고, 귀가 순해지기 마련이거늘, 아흔의 나이에 보여주신 수줍음 때문이었을까? 길지 않은 방문을 마치고 다시 길을 건넛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계속 할머니 생각이 났다. 공주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사시다 영구임대 단지까지 오시게 된 걸까? 곱게 늙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무색한 할머니의 정갈한 모습은 무던한 노력과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할 텐데 공주 할머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끊이지 않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후로도 공주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속적해서 찾아뵈었다. 처음 독거 어르신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을 때도, 공주 할머니를 제일 먼저 생각하며 기획하였고, 청소년 학생들과 함께 ‘손자녀 되어드리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도, 공주 할머니의 웃는 모습을 상상하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즈음의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요양보호사가 도움 방문을 드렸다는 어슴푸레한 기억만 있을 뿐이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 회장을 맡았던 가장 바빴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변명도 해보지만 처음 그 느낌대로만 공주 할머니를 남기고 싶은 내 욕심에 이후의 기억들이 바래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어르신들에게 동일하게 제공된 공간이지만, 제각기 살아온 모습들에 따라 다르게 채워지는 공간을 통해 곱게 늙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나의 첫 선생님 공주 할머니. 일 년에 한 번도 입지 않는 옷들이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내 옷장과 언제 쓸지는 모르지만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욕심껏 모아놓은 예쁘고 비싼 그릇들로 채워진 찬장과 언제 다시 꺼내 읽을지 기약 없이 꽂혀 있는 책들로 가득 찬 책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무언가를 사들이며 내 마음의 여유 공간마저 좁혀가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나 자신을 점검하게 하고,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사회복지라는 어려운 일을 제대로 하게 도와주고 계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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