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외숙] 사람, 참 징하다. 아니 찡하다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사람, 참 징하다. 아니 찡하다


단단하고 메말랐던 어르신의 굳은 마음에

복지라는 씨앗을 뿌린 게 아니었을까


참 사랑의 집이 위치한 지역은 창원에서 가장 낙후된 달동네 같은 곳이다. 싸지만 환경이 열악한 셋방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는 곳. 그러다 보니 기초생활수급자나 소득이 거의 없는 어르신들이 많이 살고 계신다.


어느 해 봄, 풍채가 육중한 한 중년 남성이 센터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셔츠에 신사복 바지를 입고, 조끼 위로 회중시계 줄을 늘어뜨린 모습은 뭔가 차려입은 듯 보였지만, 지저분한 옷, 퉁퉁 부은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다.


센터로 들어오지는 않고 계속 안쪽만 힐끔거리고 계시기에 나가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묻자, 식사 배달을 신청하러 왔다고 하셨다. 노부모님의 식사 배달을 신청하시는 것인지 묻자, 본인 식사라고 하셨다. 사정인즉슨, 기초생활수급자인데다,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정해진 거처도 없이 근처 여인숙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셨다.


상처투성이인 과거를 안은 채 절망과 결핍, 회한이 뒤섞인 얼굴로 잘려나간 손가락처럼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식사 배달은 65세 이상 어르신들에게만 제공되지만, 긴급지원으로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직원이나 자원봉사자가 여인숙을 드나드는 모습은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배달은 어렵고 무료급식소에 식사하러 나오시라고 권했다. 걷는 게 힘들어서 나오기가 어렵다고 하시는 어르신에게 운동도 하실 겸 천천히 나오셔서 시간을 보내시라고 재차 권했더니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하셨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눈치여서 곁에서 기다렸지만 입술만 몇 번 달싹이시더니 자리를 떠나셨다.


이후 이삼일 정도 급식소에 오셔서 식사를 하셨는데, 또 며칠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궁금해하던 차에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 어르신이 거동이 너무 힘들다고 하셔서 휠체어를 구해 드렸는데, 휠체어를 밀고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라 급식소에 갈 수 없으니 본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도시락 배달을 요청하셨다는 이야기였다.


‘충분히 다닐 수 있는데도 공무원한테 무조건 큰소리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여기시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래서 어르신이 특수한 상황이니 방을 구해서 나오시면 그때부터 식사 배달을 해드리겠다고 안내했다.


며칠 후 다시 동사무소에서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어르신이 동사무소를 찾아가서 방을 구해내라고 소란을 피우셨다고 했다. 긴급지원 신청을 해둔 상태이고 방법을 찾고 있으니 조금 기다려달라고 몇 번이나 설명을 해드렸지만, 눈을 부라리며 당장 방을 구해주지 않으면 동사무소 로비에 드러눕겠다고 생떼를 쓰고 가셨다고 한다.


한 달여 정도 지났을까, 담당 공무원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어르신이 셋방을 구해서 이사하셨다고 전해왔다.


이제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설 차례였다. 매일 찾아가 안부를 묻고, 도시락을 챙겨드리면서 어르신과의 관계가 나날이 깊어져 갔다. 혼자 사시는 분이라 지역 후원자를 통해 세탁기와 냉장고도 구해드렸다.


그런데 얼마 뒤, 어르신이 동사무소를 찾아가서 세탁기와 냉장고를 구해달라고 하셨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어르신께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일전에 구해드린 물건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사이 담당 공무원에게 매일 찾아가 세탁기를 구해내라, 냉장고를 사달라고 고함을 지른다고 했다.


‘대체 이분에게 무엇을 얼마나 더 해드려야 할까?’, ‘필요한 물건이니 다시 구해 드려야 하나? 아니면 한 번 드렸으니 그다음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하루는 눈 상태가 이상하다며 안과에 다녀오셨다. 병원에 갔더니 난치성 황반변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시력상실을 더디게 하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이 원하는 것은 진료 시 동행이나 영양제 요청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글라스, 컴퓨터 등등 엉뚱한 물품들을 원하셨고, 혹 필요성이 인정되어 구해드린 물건들도 며칠만 지나면 하나씩 둘씩 사라져갔다. 중고상에 내다 파셨는지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게다가 댁으로 방문하는 요양보호사나 자원봉사자를 끊임없이 젊은 여자로 보내 달라고 성화였다. 매일 청소와 집안일, 심부름까지 해달라고 요구하셨다. 이쯤 되자 직원들이나 봉사자들에게서 항의가 쏟아졌다.


며칠 뒤, 어르신이 타 기관에 노인돌봄종합서비스를 신청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기존에 받던 재가노인지원서비스와 중복으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서비스를 종결하실 건지 상담하기 위해 어르신 댁을 찾아갔다.


몸도 아프고, 혼자 살면서 살림에 대한 도움도 필요하니 돌봄종합도 받고, 재가지원의 도시락도 모두 받아야겠다며,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 도와달라는데 어떻게 하나를 끊겠다고 하느냐며 목청을 높이셨다. 이 길고 긴 소란은 구청에서 시청으로 넘어갔고, 창원시장 비서실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 진심 어린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은 녹록지지 않은 일이다.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원칙도 지켜야 한다.


결국 어르신은 돌봄종합서비스를 받기로 하셨고, 그날로 우리의 역할도 끝난 듯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르신이 다시 센터를 찾아오셨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색하고 쭈뼛거리는 모습이었다. 돌봄종합서비스를 이용하시며 수시로 방문지도사를 바꿔달라고 닦달하고 항의하다가 결국 이용을 끝내셨다고 한다.


‘예전에 참 고마웠소. 내 그 인사를 못 해서 왔소’ 하시며 머뭇머뭇하셨다. 미운 정이 무섭다더니 나도 모르게 “그러지 마시고 저희가 댁에 다시 찾아가면 어떨까요?” 하고 말을 건넸더니 금방 얼굴이 환해지신다. 직원들 애먹일 때는 참 밉고 야속했는데, 그리 환하게 웃으시니 가슴 속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찾게 된 어르신 댁은 이제 마음 편히 들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찾아가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반겨주셨다. 어쩐 일인지 예전에 생떼를 부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몇 개월 뒤, 경기도에 사는 딸네 집으로 가시게 되면서 어르신과의 인연이 끝나게 되었다. 한참 후에 우연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제는 아쉽고 그리운 마음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지난 사진을 정리하다가 편지 한 장이 찍혀있는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에는 짧은 글들이 쓰여 있었다. ‘찾아갔을 때, 먼저 그렇게 말해서 늙은이 체면을 살려줘서 고맙다. 이 늙은이 사는 것을 매일같이 들여다봐 주어서 정말 고맙다. 도시락이 참 맛있었던 것도 고맙다.’ 이사장님께 전한 어르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 사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는 단단하고 메말랐던 어르신의 굳은 마음에 복지라는 씨앗을 뿌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은 변화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싹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씨앗. 우리 사는 세상살이도 참 그렇지 않은가? 시작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또 그립기도 하다. 사람 사는 일이 이렇게 징하고 또 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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