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친애하는 보호자님께!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친애하는 보호자님께!


우린 청소하고 빨래하는 기계가 아니라고!

당신들과 똑같이 느끼고 맞으면 아픈 사람이라고!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는 항상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식모’라고 불리는 언니가 있었다. 한 명은 항상 있었고, 때로 두 명, 혹은 세 명이 될 때도 있었다. 1960년 초반, 당시로써는 드물게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셨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살림의 ‘살’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언니들을 데리고 집안 살림을 진두지휘하셨다.


우리 집은 4남매였다. 우리는 그저 학교만 제대로 잘 다니면 만사 오케이였다. 잘 놀고, 잘 먹고, 빠지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일이 전부였다. 자고 일어나서 아이 넷이 뱀허물 벗듯이 아무 데나 벗어놓은 옷가지들은 학교 다녀오면 깨끗이 세탁되어 빨랫줄에 걸려 있었고, 여기저기 읽다가 내팽개쳐둔 책들도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과자부스러기며 머리카락, 먼지들이 굴러다니던 방바닥도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당시 우리는 매일 누가 그런 수고를 해주는지도 모른 채 마음껏 집을 어지럽히며 지냈다. 결혼 후 내 손으로 그 모든 일을 하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법 공부를 했던 나는 중학교 때 인천에서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한 살 위 언니까지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게 되자 엄마는 학교 근처에 집을 하나 얻어서 우리 세 자매와 ‘식모 언니’ 한 명을 붙여서 올려 보내셨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언니는 우리보다 고작 두세 살 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식모 언니를 마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쯤으로 여겼던 듯하다. 우리 셋이 학교에 가면 언니는 집을 청소하고,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복을 빨아서 다리고, 밥을 해주었다. 어느 날 동생이 미키마우스 시계가 없어졌다며 아무 증거도 없이 그 언니를 취조하듯 몰아세웠고, 나 역시 그 언니가 도둑질이나 하는 질 나쁜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런데 몇 년 전, ‘식모’ 라고 부르던 언니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 뼈아프게 생각해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사람 취급’, 즉 나의 인권 감수성이 부족하다 못해 얼마나 빈곤한 지를 깨닫게 된 일이 내가 몸담은 있는 노인복지사업장에서 일어났다. 내가 언니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 무시하던 눈빛들이 독화살로 나에게 돌아와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20년 전부터 신체적·물질적 도움이 필요하신 어르신들을 돕는 노인복지에 종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건이 되지 않아 요양원이나 시설을 이용할 수 없거나, 본인이 거부하는 분들의 집으로 찾아가서 집안일 등 필요한 자원을 연결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좋은 일 하시네요’ 하고 인사치레하기 좋은 복지 사업 말이다.


2011년 10월, 하늘이 맑았던 가을. “따르릉” 우리 센터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르신 내외가 살고 계신 집에 파견을 나갔던 우리 요양보호사였다. 수화기를 들자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무슨 일인지를 묻자 말도 못 하고 울음을 터트리더니 겨우 사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아침, 어르신 내외가 살고 계신 댁에 우리 센터 요양보호사 두 사람은 치매 할머니 목욕을 위해 방문했다. 할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으신 지 10년이 넘어 중증단계였고, 할아버지가 계속 혼자 돌보시다가 1년 전부터 서비스를 받기 시작하셨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요양보호사들이 할머니를 목욕시켜 드린 뒤, 한 명은 옷을 챙기고 다른 한 명은 할머니를 부축하여 목욕탕에서 나오던 참이었다고 한다.


한 요양보호사가 거실에 멍하게 앉아 있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할아버지께서 천천히 일어나시더니 베란다 문을 열고 12층 아래로 훌쩍 몸을 던지셨단다. 두 사람 모두 할머니 팔을 잡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외마디 비명밖에 지를 수 없었다고 한다. 대강의 내용을 전해 들은 나는 할머니를 다독이라 이르고, 황급히 경찰서에 전화를 넣고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다음 방문 가정에 전화를 넣었다.


두 요양보호사는 오후에 각기 다른 집으로 돌봄 일을 나가도록 일정이 짜여 있어서, 방문해야 할 댁에 양해를 구해야 했다. 말도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두 요양보호사는 우선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고, 후에는 정신보건센터에서 상담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첫 번째 집의 보호자는 사정을 말씀드리자 “김 선생님이 많이 놀라셨겠네요.” 라며 위로하시며 센터 상황을 이해해 주셨다.


문제는 두 번째 집이었다. 치매 어르신의 보호자인 며느리는 사정을 다 듣더니 벌컥 화를 냈다. “그 집에서 벌어진 일 하고, 우리 집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오후에 나가야 하니까 시간 맞춰 와주세요!”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속으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죽었다니까!! 그 일이 우리 선생님들 눈앞에서 벌어졌다니까! 우린 청소하고 빨래하는 기계가 아니라고! 당신들과 똑같이 느끼고 맞으면 아픈 사람이라고!’ 씩씩거리며 그 댁 며느리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쳐봐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 요양보호사에게 오후 일정을 뺄 수 없었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그는 조금 진정이 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으니 그 댁을 방문하겠노라고 답했다.


이 요양보호사와 이야기를 끝내고 허탈한 마음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그 댁을 방문했던 사회복지사에게 할머니보다는 할아버지의 우울증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물론 먼 지역에 사는 자녀들에게 일단 전화로 한 번 의논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자녀들이나 나나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주된 관심사였기에 큰 말썽 없이 조용히 지내시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 집에서 벌어진 일 하고 우리 집하고 무슨 상관이냐’ 며 화를 내던 그 댁 며느리나 나나 별반 차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어릴 때 우리와 함께 살던 식모 언니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우리들 뒤치다꺼리리 하느라 얼마나 고됐을까?’, ‘남의 교복을 빨아주면서 얼마나 학교에 가고 싶었을까?’ 등 단 한 번도 언니 처지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결국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요양보호사는 사표를 냈다.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사람 돌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요양보호사의 사표 결제가 올라온 날 할머니의 요양원행 소식도 듣게 되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낯선 환경에서 얼마나 더 혼란스러워할까 가슴이 저릿했다.


자식이 부모를 돌봐야만 하는 시대는 끝났다. 며느리나 딸도 사회에 나가 일을 하게 되었고, 국가는 사회적 돌봄 제도를 만들었다. 그 제도 아래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이라지만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도 많다. 돌봄 영역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비천한 일이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무지한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나 지금의 보호자들 역시 운이 좋아야 30년 후, 아니면 그보다 일찍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가 왔을 때, 돌봐주는 이들이 나를 사람이 아닌 ‘일거리’ 로 취급하지 않길 바란다. 목욕하고 옷을 입을 때 팔 넣을 곳을 찾지 못해 허둥대도, 신발이 화분인 양 물을 주고 있어도, 남은 삶을 살아내려는 한 인간의 분투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람이나 낯선 손길에 벌거벗은 몸을 맡긴 사람이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임을 안타까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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