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외숙] 눈 위의 발자국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눈 위의 발자국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고,

함께 보낸 시간은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일까?


어느 해 겨울, 늦은 밤까지 흰 눈이 펑펑 내렸다. 경상도 창원은 겨울에도 눈을 보기 힘든 지역이다. 제설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한 번 눈이 내리면 다음날은 어김없이 빙판길로 출근길은 전쟁이 된다.


‘다들 무사히 출근해야 할 텐데…….’ ‘이런 날씨에 도시락은 제때 배달할 수 있을까?’


‘산모퉁이 사는 어르신은 나오지 말고 댁에 계셔야 할텐 데, 어제저녁에 전화라도 드릴 걸 그랬나?’ 이런저런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이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창밖을 보니 다행히 눈발이 멎어있었다.


이른 아침, 동료들은 쌓인 눈 때문에 어르신을 찾아뵐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야무진 손길로 도시락 준비에 한창이었다. 멀리 계셔서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어르신께는 전화로 안부만 묻고, 가까이 사시는 어르신들만 우선 방문하기로 했다.


도시락을 들고 길을 나선 우리들 앞에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이 펼쳐졌다. 산과 들에 온통 눈이 덮여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낯선 느낌이 들었다. 조심조심 눈을 헤치며 걷느라 평소보다 훨씬 더딘 속도에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그래도 그 길 끄트머리에 사시는 어르신을 뵙고 나면 밤새 안녕하셨구나, 다행이다 하는 마음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동료들과 함께 한 분 한 분을 찾아뵈었다.


드디어 북면 중방마을에 들어섰다. ○○○어르신 댁에는 전화가 없어서 밤새 안녕하셨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발걸음이 더욱더 빨라졌다. 도시락을 들고 양철 대문을 밀어보니 마당에 쌓인 눈 위에 희미하게 발자국이 나 있고, 댓돌 위에는 낡은 고무신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밖에 나가려다 눈 때문에 방에만 계시나? 아니면 주무시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어르신.”하고 부르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나서 얼른 가마니를 엮어 만든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석유풍로 위에 올려진 큰 대야가 검게 그을려 연기가 풀풀 나고 있다. 황급히 불을 끄고 연탄집게로 대야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신발을 벗고 작은 툇마루에 올라 문고리를 잡았더니 날이 추워서 손이 쩍 달라붙는다. 다시 어르신을 불러도 기척이 없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방문을 열자 어르신은 이불을 덮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계셨다. 그해 겨울, 흰 눈을 이불 삼아 어르신은 그렇게 하늘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


마루로 나와 찬바람을 쐬며 아득해진 정신을 겨우 추슬러 사무실에 상황을 알리고, 119와 파출소, 면사무소에도 연락을 넣었다.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에 희미하게 남은 어르신 발자국 곁에 우리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다. 다시 부엌으로 가보니 부뚜막에는 지난봄 생일잔치 때 선물 받은 예쁜 단화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아끼느라 신지도 못 하고 눈으로만 보면서 좋아하셨을 것이다. 어르신은 세숫물을 준비하느라 새벽에 나와 풍로 위에 물 담은 세숫대야를 올리셨을 것이다. 그사이 하늘나라로 가실 줄도 모르고..... 만약 오늘 눈 때문에 어르신 댁에 오지 못했다면, 우리가 도시락 배달을 포기해버렸다면, ○○○어르신의 마지막 가는 길은 더 외로웠으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 생전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졌다. 어르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며칠이나 감지 않아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를 하고는 마루 끝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시는지 눈이 빠지도록 양철 대문을 바라보고 계셨다. 비누도 샴푸도 없어서 급한 대로 주방세제로 머리를 감겨드렸다. 내친김에 미용 봉사자를 데려와서 머리도 산뜻하게 잘라 드렸다.


어르신에게는 두 자녀가 있었지만, 자식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한 번을 찾아오질 않았다. 그런데도 손자, 손녀 주려고 텃밭에 옥수수며 고구마를 심었다가 수확하면 작은 냉장고가 터지도록 차곡차곡 쟁여두며 자식과 손주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으셨다. 매일 사회복지사들이 찾아갈 때마다, 자식은 꼭 아들 다섯이 있어야 한다며 당부하셨다.


오매불망 자식들만 기다리는 어르신 모습에 속이 상해서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 많이 낳아 뭐해요’ 볼멘 목소리로 답하면, 어르신은 내 손을 도닥이시며 ‘그래도 나 죽으면 자식들이 장사 치러 줄 건데…….’ 라고 나지막이 타이르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항상 죽음으로 귀결되는 인연의 끝은 몇 번을 경험해도 무뎌지지 않는다. 녹아버리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눈 위의 발자국처럼, 사라져버린 어르신과의 시간이 애처롭다. 하지만 여전히 내 가슴 속에는 어르신과 함께 보낸 시간, 추억들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프린트 메일보내기

기사에 대한 댓글

  이름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