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외숙] 나의 선급 기부금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나의 선급 기부금


어르신이 구름타고 하늘로 가시는지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우리 센터(참사랑의 집)는 창원 시청에서 기초수급자가 가장 많은 지역을 추천받아 시작하였다. 오일장이 서고, 월세가 가장 싼 달동네에 위치해 있다. 당시 버스가 다니는 큰길가에는 술집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바로 뒷골목은 어둡고 초라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한 끼라도 따뜻하게 먹고 싶어서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 세상에 나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노력을 알아주는 이가 누가 있을까? 사회조차 외면한 그들을 위해 작지만 그 노력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어르신들을 좀 더 편안히 모시고자 노력하는 나날이었다.


찾아오는 분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식탁마다 이름을 붙였다. 9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에게는 무병장수하시라는 의미에서 장수석, 학처럼 고고하게 사시라고 학석으로 구분하여 지정석을 관리하면서, 하루하루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년 4월, 자원봉사자 50명과 함께 경남장애인체육대회를 열심히 준비하였다. 당시 장애인체육대회는 예산도 지원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선수들의 번호표도 직접 만들어야 했고, 꽃다발을 살 여력이 없어서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직원들과 힘을 모아 꽃 도매시장에서 사온 꽃으로 직접 수상자 꽃다발을 만들어야 했다.


그 해도 변함없이 볕이 잘 드는 급식소 마당에서 대회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식사를 마치고 곧장 돌아가셨고, 어떤 분들은 잠깐 남아서 한글이나 민요를 배우고 계셨다. 장수 어르신들 몇몇은 급식소 마당 한 편에 앉아 꽃다발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다른 날과 다를 것 없는 보통의 하루였다.


그때 갑자기 한 어르신이 의자에 앉아 계시다가 한쪽으로 스르르 넘어지셨다. 마침 옆에 계시던 수지침 선생님께서 알아채시고 119에 신고하였고, 다행히 119 안전센터가 급식소 가까이에 있어 신속하게 병원으로 모실 수 있었다.


혼자 사는 분이라 보호자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 동사무소에 긴급 의뢰하여 보호자를 찾아 소식을 전하였다. 다행히 며칠 뒤,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고, 집에서 쉬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다른 어르신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사회복지사들과 병문안을 갔더니,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하셨다. 혼자 누워 계시는 어르신이 걱정되어 매일 죽을 싸 들고 가서 안부를 확인했다. 가끔 딸들이 찾아와서 수발을 해드리는 것 같았다. 몇 번 마주쳤을 때는 어머니 혼자 계시는 게 불안했는데, 항상 들여다봐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그해 여름을 넘기지 못 하고 먼 여행을 떠나셨다.


그런데 그다음 날 상복을 입은 따님들이 찾아와 급식소에서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렸다. 옆에 계시던 어르신들이 “평소 돌보지도 않고 혼자 사시게 한 게 미안해서라도 조용히 상이나 치르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찾아올 일이지 떼쓰면 뭐라도 나올 줄 알고 행패를 부린다”며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또 어떤 어르신들은 ‘어머니 얼굴에 똥칠을 한다’ 고 욕을 퍼붓기도 하셨다.


이러다 다른 어르신들까지 휘말려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가족들을 상담실로 모시고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분히 전후 상황을 설명하였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내일이 출상이니 장례비를 달라며, 안 주면 어머니를 급식소 마당에 두겠다고 협박을 했다. ‘당신들에게 줄 돈이 있었다면, 어르신들에게 조기 한 마리라도 더 대접했을 것’ 이라고 했더니 고발하겠다고 씩씩대며 돌아갔다.


뒤늦게 사건을 알게 된 이웃 어르신들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넌지시 위로해 주셨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만 공부시킨 탓에 딸들이 원망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그렇게 즐겁지 않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어르신 일로 조사에 응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어르신을 진심으로 모셔왔건만, 진심을 알아주기는커녕 돈을 얻어내려고 험악해진 유가족의 모습에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경찰서에 가서 형사와 마주 앉았다. 첫 마디가 “전과 있어요?”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멍하게 앉아 있는데, 다시 한 번 ‘전과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서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니요’ 하고 답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상주들은 보상을 요구하지만, 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돈이 있다면 급식소 어르신들께 조기 한 마리라도 더 대접해 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조사를 끝낸 형사는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계속 봉사해주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실 그 어르신 아들과 고등학교 동창이라 누님들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조사하게 되었다면서 ‘혐의없음’ 을 통보하겠다고 조심히 돌아가라며 배웅해 주었다.


이후에도 딸들은 동사무소, 시청, 지역 파출소까지 찾아다니며 복지시설이 무슨 정부 기관인 양 피해를 보상하라며 계속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지역주민들과 단체들은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지내다 돌아가신 어르신을 안타까워하며 임종 뒤에 돌변한 가족들의 태도에 장례식장에서 그들을 나무라는 뒷말들이 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르신의 아들이 혼자 센터에 찾아왔다. 누나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풀어줄 명분을 찾으러 왔다며 통사정을 했다. 자신도 이 소란을 하루빨리 해결하고 싶다면서 이번 한 번만 센터에서 양보해줄 수 없겠느냐며 애원을 했다. 금전적 보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한편으로는 누나들 등쌀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아들은 연신 미안하다면서도 하루가 멀다고 센터를 찾아왔다. 누나들의 행동은 괘씸했지만 아들의 정성에 못 이긴 척 양보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건을 달았다. ‘이건 아드님의 선급 기부금입니다. 제가 선급으로 기부하는 대신 아드님이 나중에 복지기관을 후원하고 거기서 봉사한다는 조건입니다’ 라고 했더니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적은 돈이었지만 어르신 가시는 길 편히 가시기 위한 노잣돈이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보니, 어르신이 구름 타고 하늘로 가시는지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가족들과 식사하려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어르신의 아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더니,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봉사활동도 하고 기부금도 내며 열심히 살고 있다고 묻지도 않은 고백을 속사포처럼 꺼내놓는다. “아, 헛되지 않았구나” 그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메마른 땅에 심은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운 것 같은 감동이었다. 그렇게 그 어르신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신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을 보면, 우리 어르신들이 나를 수호천사처럼 지키고 일깨우는 것 같다.


그 일이 있었던 뒤, 해마다 익명으로 기관 입구에 쌀을 후원하거나 후원금이 들어오는 일이 여러 번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여전히 나는 그 어르신과 아들을 생각하곤 한다. 그해 4월은 정말 나에게 잔인한 달이었다. 그러나 너무 소중한 인연이었기에 그저 지나감이 서글퍼 그렇게 사무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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