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주치의, 의사는 ‘질문봇’이어야 한다
2018-07-06 입력 | 기사승인 : 2018-07-06
데스크 bokji@ibokji.com

‘의사’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좁은 진료실, 딱딱한 표정. 의사를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긍정적이지 않다.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은 그 점이 참 이상했다.


추 원장이 아는 주변 의사들은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의학적 지식을 갖춘 ‘믿을 만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환자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를 보면 그런 장점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아 의문이었다. 추 원장이 꿈꾼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관계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의료수가제는 환자가 아플수록 의사가 경제적 이익을 취득할 수 있는 구조다. 의사의 이익과 환자의 이익이 정반대에 놓여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의사가 환자의 건강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하더라도 의사와 환자가 반목할 수밖에 없다.


추 원장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에서 찾았다. 의료사협은 지역주민, 조합원, 의료인이 공동으로 비영리의료기관을 운영하는 단체를 말한다. 환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환자가 아프기 전에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추 원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몸과 마음, 동네를 살린다


‘살림의원’의 모태가 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9년 의료생활협동조합으로 시작한 살림의료사협은 2012년 2월 조합원 348명과 출자금 3200만 원을 기반으로 살림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고 같은 해 8월에 ‘살림의원’이 문을 열었다.


2016년에는 살림치과가 개원했다. 2017년 12월까지 살림의료사협의 조합원 수는 2308명, 출자금은 11억 5000만 원이 모인 상태다. 의료생협으로 시작해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조합원 수는 물론 출자금 규모도 크게 불어났다.



<살림의원 의사들은 ‘동네 주치의’라는 말을 쓴다. 주민의 건강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애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C영상미디어> 


서울 은평구에 자리한 살림의원은 환자의 건강을 위해 더 많은 ‘잔소리’를 하는 병원이다. 동네 의원을 찾는 사람 중 당뇨,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이나 거북목증후군, 터널증후군 같은 생활습관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어서 몸에 구조적인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직업이나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병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운동 처방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야지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환자의 생활에 개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살림의원은 다른 병원과 좀 다르게 적극적으로 환자의 일상에 처방을 내린다. 운동이 필요하면 구체적인 운동 처방을 하고 일상생활이 달라져야 한다면 일상 처방을 내리는 식이다. 이렇게 살림의원 의사들은 ‘동네 주치의’로 활약하고 있다.



<좌측이 살림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을 주민과 함께 만든 추혜인 원장,

우측이 7월 개원하는 살림의원 혁신파크점의 김신애 원장 ⓒC영상미디어> 


“동네 주치의는 살림의료사협 조합원뿐 아니라 조합원이 살고 있는 마을의 건강도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조합원과 주민이 건강해지면 동네도 건강하고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담았어요. 아직 이름만큼 큰 역할을 하고 있진 않은 것 같아요.” 


추 원장은 살림의원이 동네 주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살림의원은 제법 동네에서 인정받는 병원이다. 이곳에 온 환자들은 가족단위가 많다. 두 원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은 날도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은 의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7월이면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 김신애 원장이 환자들을 만날 혁신파크점이 새롭게 문을 연다.


동네 주치의는 어떤 방식으로 환자를 대할까? 살림의원 진료실에 환자가 들어서면 의사들은 ‘질문봇’이 된다. 예를 들어 위에 통증이 있어서 왔다고 치자. 언제부터 아팠는지, 어떨 때 아픈지, 술이나 담배를 하는지, 운동은 얼마큼 하는지, 가족력은 있는지 등 증상을 파악하기 위해 충분히 문진을 한다.


추 원장과 김 원장은 환자에게 문진하는 것을 ‘관계 맺기’라고 표현했다. 환자와 관계를 맺은 다음에는 필요에 따라 약을 처방하거나 운동을 처방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불량이나 통증이 생겼을 수도 있어서 일상에서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의논하기도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내시경검사를 한다. 단 의심이 가는 병이 있을 때 확인하는 차원에서 권한다. 


하루에 수십 명이 오는 살림의원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었는지 묻자 추 원장이 개원 초기에 만난 환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기운이 없다고 영양제를 놓아달라는 환자가 있었어요.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영양제를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영양제를 놓지 않고 문진을 했어요. 언제부터 기운이 없었는지, 하나하나 물어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죠. 혈변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신체검사를 해보니 빈혈이 너무 심했어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바로 큰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는데 다시 우리 병원에 왔어요. 위내시경을 해보니 큰 종양이 발견됐어요. 그 길로 바로 수술을 받았죠. 그 환자가 나중에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봐준 병원은 처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문진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환자에게도 신뢰를 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케이스였어요.”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자에게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살림의원 의사들이 문진을 충분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치료를 목적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도 많지만 불안감 때문에 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어떤 증상이 있는데 이게 병원에 갈 만한 증상인지,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어떤 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큰 병원에 가야 하는지 걱정하는 환자에게 방향을 잡아주는 것도 문진을 많이 해야 가능하다.


문진을 많이 하면 처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때그때 필요한 질문을 하기 때문에 진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물론 어려운 점도 있다. 동네 주민의 주치의가 되고 싶어 시작했지만 진료 건수가 많아지니까 일일이 다 신경을 쓰지 못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7월에 개원을 앞둔 살림의원 건강혁신점은 환자 수를 하루 30명으로 제한한다.


일반 의원이 하루에 70~80명을 진료하는 것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다. 환자 수를 제한하는 이유는 건강혁신점에서 만든 주치의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다. 주치의 프로그램에는 예약진료, 나의 건강 역사 차트, 개인맞춤형 건강 체크, 생활 처방, 운동 처방, 전화와 문자 상담이 포함된다. 운동 처방과 생활 처방은 주치의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주민과 마을의 건강을 책임지는 동네 주치의


생활 처방은 환자의 일상생활에서 통증을 일으키는 요소를 찾아서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다. 허리가 아프다면 오래 앉아서 생긴 통증인지 운동 부족 때문에 생긴 통증인지를 먼저 파악한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근육이 뭉친 경우라면 볼 마사지나 직장에서 앉아 있는 시간을 활용해 할 수 있는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알려준다.


운동은 환자가 겪고 있는 문제에 따라 다르게 처방한다. 운동 처방도 다른 처방과 마찬가지로 처방하기 전에 충분히 환자와 얘기를 나눈다. 환자의 대답을 바탕으로 자료를 뽑아서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방향을 찾는다.


운동 처방 프로그램 중 동네 어르신들의 건강에 혁혁한 공을 세운 프로그램이 있다. 어르신들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 만든 ‘흰머리 휘날리며’다. 처음에는 근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유연성과 밸런스를 기르는 운동도 함께하고 있다. ‘흰머리 휘날리며’ 처방 목적은 어르신들의 ‘낙상 방지’다. 2년 이내 완치하지 않으면 낙상자 중 10%가 사망한다. 흰머리 휘날리며는 유연성과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힘을 길러서 어르신들이 넘어지기 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이 스쿼트를 하면서 젊은 사람 못지않은 ‘말벅지’를 뽐낸다. 흰머리 휘날리며가 운영된 4년 동안 낙상 사고가 단 한 번도 없었던 걸 보면 꽤 효과가 괜찮은 편이다. 운동을 하는 어르신들은 우스갯소리로 저승사자가 오면 근육이 짱짱한 허벅지를 보여주며 “못 간다고 전해라~” 하겠단다.


조합원끼리 함께 운동하며 정을 붙이다 보니 동네 주민들끼리도 사이가 돈독하다. 살림의료사협에는 살림의원, 살림치과 같은 의료기관을 베이스로 운동센터 다짐을 거쳐 운동, 요리, 악기 연주 등을 함께하는 소모임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병을 치료하러 온 사람들이 소모임 활동으로 병을 고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일상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한 것이다. 주민이 일상을 함께하다 보니 동네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졌다. 살림이 마을공동체를 살리는 ‘동네 주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 사이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나를 믿고 우리 병원을 찾는 사람들과 꾸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시작했는데 조금씩 성과가 보이는 것 같아 기뻐요. 살림의원이 우리 동네에 믿고 갈 수 있는 단골 의료기관의 모습을 갖춘 것 같아서 다행이죠. 아쉬운 점도 있어요. 동네 주치의를 표방하지만 하면 할수록 주치의 활동이 힘들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요. 아직은 제도적 뒷받침이 없으니 아무래도 힘든 부분이 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주치의제도를 실험해보고 싶어요.”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


<이 글은 ‘위클리 공감’에 게재된 내용으로 공공누리에 의거 공유함>



데스크 bokji@ibokj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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